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넬리크 2세 (문단 편집) === 에티오피아 통합 === 메넬리크가 에티오피아 황제로 즉위했을 무렵, 에티오피아는 16세기부터 시작된 고질적인 전쟁으로 대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에티오피아 제국 내부의 수많은 부족들이 저마다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이웃 부족과 전쟁을 벌였고 자신들에게 간섭하려는 황제에게 반기를 들기 일쑤였으며 여러 황제들이 부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에티오피아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의 위협이 끊이지 않았고 노예상인들이 에티오피아와 그 주변 민족들을 계속 노예로 잡아갔다. 메넬리크는 이렇듯 수백년간 혼란에 휩싸여 있었던 에티오피아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했다. 메넬리크는 정치적 합의를 통해 북부 영토 대부분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예외는 고잠이었지만, 그들도 1882년 6월 6일 엠바보 전투에서 군대의 절반 이상을 섬멸당하는 패배를 당하고 다시 복속되었다. 또한 1898년 티그레이의 왕으로 인정해줬던 선제 요한네스 4세의 아들 멩게사 요한네스가 이탈리아의 빽을 믿고 반란을 일으키자 즉각 진압했다. 한편, 그는 짐마, 웨레가, 체포와 같은 대부분의 서부 및 중부 지방에 대해선 중앙정부와 메넬리크의 일가를 따르는 부족장들이 자율적으로 다스리게 했고, 라스 고바나 다체, 라스 미카엘 알리[* 후임 황제 이야수 5세의 아버지. 오로모인으로, 선대 황제 요한네스 4세 대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오로모인들이 살던 월로 지역의 라스(공작)이었으며, 아드와 전투에도 참가해 공을 세웠다. ], 술탄 아바 지파, 쿰사 메레다, 하베지오르기스 디네그데, 발차아바 네프소, 조트 툴루 등 원주민 병사들과 연합해 에티오피아 남부의 영토를 확장했다. [[파일:800px-Menelik_campaign_map_1_3.jpg]] 1879~1889년경 메넬리크의 원정. 색칠된 땅들은 모두 당시 에티오피아의 영토이다. [[파일:800px-Menelik_campaign_map_2_3.jpg]] 1889~1896년경 메넬리크의 원정 [[파일:800px-Menelik_campaign_map_3_3.jpg]] 1897~1904년경 메넬리크의 원정 1880년대 초반부터, 메넬리크는 남, 동, 서부의 땅과 사람들을 하나의 제국으로 재통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원정을 단행해 [[오로모인]], 시다마, 구라즈, 월리아타 등 남부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지마, 레카, 우레가와 같이 순순히 메넬리크에게 투항한 지역은 이전처럼 자치를 누렸고 중앙 정부는 자치 정부에게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메넬리크는 피정복민들의 종교적 믿음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자였지만 무슬림들에게도 잘 대해줬고 그의 친구들 중엔 무슬림이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다가 무력으로 정복된 지역에 대해서는, 메넬리크가 무자비하게 응징했다. 그의 군대는 피정복민에게 고문, 학살 등 잔혹행위를 자행했다. 디지족과 카피코 왕국의 사람들에게 대규모의 잔학행위가 벌어졌다. 학자들은 메넬리크 군대에게 맞서다 전사하거나 학살당하거나 고문당해 죽거나 기아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효가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메넬리크의 러시아 출신 군사 보좌관 알레산드로 블라토비치에 따르면, 메넬리크의 군대는 오로모 인구의 절반 이상을 학살해 오로모 주변 겔라 일대의 모든 부족들에게 어떤 종류의 반란도 생각할 가능성을 배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정복 전쟁 와중인 1888년에서 1892년까지 에티오피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이 닥쳤다. 이 기근으로 총 인구의 3분의 1인 3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근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소에게서 비롯된 전염성 바이러스가 가축에게 돌아 90% 이상의 소가 폐사하는 바람에 벌어졌다.[* 이 전염성 바이러스는 우역이었는데 이렇게 극심한 피해가 난 것은 유라시아 쪽 소들은 우역에 자주 노출된 탓에 어느 정도 면역 능력이 있어서 우역이 발병해서 유행해도 그 피해가 파멸적인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아프리카 쪽 소들은 우역에 전혀 감염된 적이 없었던 탓에 우역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 능력이 전혀 없었던 탓이다. 유럽인이 처음 미주 대륙에 도착하여 유럽인이 가져온 [[천연두]] 바이러스에 처음 노출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치사율이 8~90%에 달했던 것과 비슷한 사례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정복 행위를 벌인 이유는, 제국 확장과 중앙집권화와 같은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바로 토지 때문이었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경제는 당시 전형적인 중세식 경제로서 토지가 모든 경제의 기반이자 핵심이었고, 토지가 없는 이들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들었다. 그런데 판관의 시대를 거치며 점점 토지를 잃고 하위층으로 떨어지는 농민들이 많아졌고, 반대로 귀족과 셰와와 같은 고위 군사 계급들에 의한 토지 집중 현상은 더 심해졌다. 메넬리크 2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영토를 정복해 그 땅을 사람들과 측근들에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토지 집중 현상을 다소 해결했다. 한편, 메넬리크는 제국의 수도 건설에 착수했다. 사실 에티오피아는 17세기에 파실리데스 황제가 곤다르를 수도로 정한 이후 이 지역은 매우 번영했으나, 판관의 시대를 거치며 점점 쇠락했고 결정적으로 테워드로스 2세가 곤다르를 두번이나 파괴 및 방화하고 수단의 마흐디 국으로부터도 파괴를 당하는 바람에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테워드로스 2세는 고잠의 데브레 타보르로 수도를 옮겼으나 도시 규모상 도저히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기 힘들었던지라 제대로 된 수도의 기능은 하지 못했으며 이에 요한네스 4세는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정사를 봐야 했다. 메넬리크 역시 여러 곳에서 야영하며 그곳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가 1887년 엔토토 산 남쪽의 온천에서 야영한 후 이곳에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수도 이름을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라고 지었다. 이 지역은 중세시대 군사기지 용도로 건설된 도시로서 오로모 인들의 침략 이후 버려져 목축 지대였다. 메넬리크의 장군들은 수도 근처의 땅을 배정받아 그곳에 자신들의 집을 지었다. 아디스아바바는 급속하게 성장해 1910년까지 약 7만명의 영주민이 있었으며 임시 거주자는 그보다 5만명 많았다. 그리고 메넬리크가 죽은 후인 1917년에는 지부티-아디스아바바를 연결하는 철도가 건설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